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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鲜国宝 文化遗物——介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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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属地:浙江1楼2011-04-11 18:16回复
    文化财名 平壤城(평양성)国宝1号
    时代 高句丽(城郭遗迹)
    所在地 平壤特别市 中区,平川区
    평양은 427년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하여 집안의 국내성으로부터 천도하게 되어 이후 고구려 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평양특별시 중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평양성은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성으로 건설된 이후 대체로 그 외곽을 원형대로 유지해 왔다.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이 있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는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에 이른다.
    평양성 성벽에서 발견된 성돌에는 평양성의 축성 년대와 함께 평양성 건설에 고구려의 5부에서 사람들이 동원된 사실, 성 공사의 담당구간, 담당자의 이름과 벼슬 등이 쓰여 있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고구려 후기의 수도성제도와 그 발전 모습, 고구려 사람들의 슬기와 재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평양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의 해자로 이용하여 그 사이를 도성으로 정하였으며, 동복방으로 폭이 좁아지면서 북쪽으로 높아지는 지세를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지세가 낮은 곳으로부터 외성·중성·내성·북성으로 구획되어 있다.
    


    IP属地:浙江2楼2011-04-1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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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내부에 있는 성벽까지 합한 성벽의 총연장길이는 약 23km이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외성은 일반 백성의 거주 지역으로 지대도 가장 낮았으며, 운하도 팠다. 또한 방형의 토지구획이 있어 ‘정전지(井田址)’의 유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중성은 중앙관청들이 있는 황성(皇城)이고, 내성은 궁궐이 있는 궁성지역에 해당된다. 북성은 방어용의 산성과 같은 기능이며 사원 등도 배치하였다.
      평양성은 외성·중성·내성에 각각 4개의 성문을 가지며, 북성에는 남문과 북문만을 두었다. 또한 성내에는 7개의 장대를 두었는데 내성의 을밀대와 북성의 최승대(最胜台)가 유명하다. 성벽은 돌로 쌓거나 돌과 흙을 섞어 쌓기도 하였는데, 능선에서는 외면축조 방법을, 평지에서는 양면축조방법을 썼다. 성벽 바깥 면은 4각추형태의 성돌로 면과 선을 맞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치(雉)는 산지대에서 성벽이 밖으로 돌출한 부분들에 배치하였다. 외부와 통하는 중요한 성문들에는 옹성을 쌓아 수비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산과 경사지를 이용하여 복쪽의 높은 산에 기대어 궁성 및 황성을 두고 남쪽에 평평한 지역에 외성을 두는 평양성의 성제는 이후 고려시대의 개경과 조선시대의 한성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도성제의 전통을 만든 것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IP属地:浙江3楼2011-04-1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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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财名 安鹤宫城址(안학궁성터)国宝2号
        时代 高句丽(城郭遗迹)
        所在地 平壤特别市 大城区 安鹤洞
        안학궁은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의 대성산 소문봉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고구려 궁으로, 427년(장수왕 15) 고구려가 수도를 중국 집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때부터, 586년(평원왕 28) 장안성으로 다시 도성을 옮길 때까지의 약 160년간 고구려의 왕궁이었다.
        안학궁은 다른 궁궐의 입지와 마찬가지로 대성산을 배산으로하여 남쪽 기슭의 평탄한 곳에 입지하였다.
        안학궁은 3개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건물들이 배치되어있다. 남북을 중심으로 외전·내전·침전의 영역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이 공간으로 가기위하여 여러 개의 문을 거치도록 하였다. 궁성의 평면은 서남향으로 쏠린 사다리꼴의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동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 볼 수 있다. 성곽 한변의 길이는 622m이고, 총면적은 약 38만㎡이다. 성벽은 토성으로 위로 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방식으로 견고하게 축조하였다. 안학궁은 발굴결과 총 52채의 건물지가 드러났는데, 이 중 궁전터가 21채, 회랑터가 31채였다. 성문은 동·서·북쪽 성벽에 각각 한 개씩을 내고, 남쪽 성벽에는 3개를 냈다. 남쪽 성문 가운데 남중문과 남동문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성곽의 4모서리에는 약수리 벽화고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각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작은 내에 맞추어 수구문(水口门)을 하나씩 두었으며, 동서 성곽 바깥에는 방어용 시설인 해자(垓子)가 있는데 폭은 80~120㎝, 깊이가 1m 정도의 규모이다. 남수구문의 안쪽에는 연못자리가 


        IP属地:浙江4楼2011-04-1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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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인되었다.
          남문을 들어서면 남북중심축을 따라 외전·내전·침전의 3영역이 차례로 배치되면서, 주변에는 부속건물을 들어서 있다. 중심구역의 북쪽에는 후원을, 좌우에는 동궁과 서궁을 배치하고 있다. 건물들의 평면상 특징은 1호 궁전을 비롯한 중요한 궁전들의 평면이 중심전각 양옆에 익사가 붙은 형식으로 조선시대 객사건물에서 보이는 평면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입면상 특징은 궁터 전반이 북쪽으로 약간 높아지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들을 차츰 높게 만들어 궁궐의 웅장함을 강조한 것이다. 안학궁의 중요한 건물들은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회랑의 경우 외전·내전·침전으로 들어가면서 그 크기가 차츰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공간의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배치수법으로 발해의 상경용천부에도 나타나는 수법이다. 정원은 침전 북쪽과 동궁 남쪽에 조성하였는데 그 중 동궁 남쪽의 정원터가 제일 큰 면적을 차지한다. 안학궁은 발굴유구와 출토유물 등을 통하여 그 규모와 형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안학궁터에서는 당시 건축술의 일단을 집작해 볼 수 있는 수막새·암막새·모서리암막새·귀면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푸른빛이 도는 회색기와이며 격자문·꽃잎문·귀면문·넝쿨문 등을 새긴 것이다. 내전에서 발견된 치미(?尾)는 높이 2.1m규모이며 길이가 65~70cm에 달하는 것으로 안학궁 건물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안학궁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높은 건축술과 재능이 집성되어 있으며, 이는 이후 우리나라 역대 왕궁들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졌다.

          


          IP属地:浙江5楼2011-04-1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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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财名 普通门(보통문)国宝3号
            时代 朝鲜时代(城郭遗迹)
            所在地 平壤特别市 中区 普通门洞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서있는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보통문은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보통문은 보통강변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사》에는 ‘광덕문(广德门)’이라 표기하고 있고, 그 밖에 ‘우양관(武阳关)’이란 별칭도 있었다. 보통문은 조선시대에는 보통강을 건너 서북방향인 의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국방으로나 교통 상으로 요지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의 주 공격로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473(성종 4)년에 중건 한 것으로 1644년, 1719년, 1777년과 그 이후에 계속 보수되었다. 보통문은 15세기 후반이라고 하는 정확한 연대를 가지고 있는 조선초기의 문루건축으로, 주심포식에서 사용된 기법이 다포식에서도 그대로 채용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어 서울의 남대문과 함께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보통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축대 위에 문루가 있는 형식으로, 문루는 조선초기의 것이다. 석축의 중앙에 있는 홍예문(虹霓门)은 폭 4.4m, 중심높이 4.55m 로 균형 잡힌 비례를 가지고 있으며 문에는 철판을 입힌 널대문이 달렸다. 석축의 상부에는 여장(女墙)을 두르고 석축하단에 큰 석재를, 상단으로 갈수록 더 작은 부재를 사용함으로써 안정감을 주고 있다.
            


            IP属地:浙江6楼2011-04-1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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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층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하층의 4개의 기둥이 그대로 상층으로 뻗는 통층 2층 누각이며 5량 구조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된다. 평면상 가운데 칸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놓는 다포계의 건물이다. 지붕마루에는 취두(鹫头)와 용두 등 장식이 있으며, 추녀(사래) 끝에는 토수(吐首)가 끼워졌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보통문에서 상층 종도리의 하부에 화반대공을 두고 그 좌우에 솟을합장을 둔 것과 상층의 기둥과 퇴보가 만나는 부분에 복화반(伏花盘)형태의 장식재, 그리고 첨차의 쌍S자형의 초각장식은 고려말 조선초의 건축물에서 보여지는 특징으로 이와 같은 건물은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IP属地:浙江7楼2011-04-1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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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财名 大同门(대동문)国宝4号
                时代 朝鲜时代(城郭遗迹)
                所在地 平壤特别市 中区 大同门洞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대동강변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성문이다.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로서 평양성의 여러 성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동문은 ‘읍호루’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는 ‘대동강의 푸른 물을 손을 드리워 떠올릴 수 있다’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예전엔 문밖에 나루터가 있고, 배다리가 놓여 있어서 대안에 선교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 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보통문과 비교할 때 중층문루에 있어 보다 정리된 후대형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석축 중앙의 홍예문(무지개문)은 보통문에 비하여 그 크기가 조금 작으며, 전·후면만 석재로 아치식으로 쌓고 가운데 부분은 반자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석축은 장대석 쌓기로 잘 정돈되어 있으며 석축위로는 총안을 가진 여장(女墙)으로 둘렀다. 이 석축은 1392년(태조 원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전면에 옹성(瓮城)을 두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IP属地:浙江8楼2011-04-1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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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루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보통문과 같이 하였으며, 상하층의 높이차를 크게 하였고, 상층의 지붕과 하층의 지붕사이에 광창을 둠으로써 실내공간이 훨씬 밝아지게 하였다.
                  중앙의 마루바닥을 석축 상면으로부터 1.5m 정도 높게 들어 올려서 마루에 앉아서도 멀리 성밖을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성의 문루가 전시에는 방어목적이 있지만 평소에는 일반적인 누정의 역할을 하였음을 고려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대동문은 조선중기에 지어졌지만 그 공포형식은 조선시대 초기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보통문의 공포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기둥은 배흘림형식으로 하면서 모서리 기둥은 중간 기둥보다 조금 높여 안쏠림을 주었다. 내부는 통기둥을 세워 시원하게 틔워 놓았다. 본래 전면에 마루를 깔고 2층에도 마루를 놓았으나 현재 1층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남겨 놓고, 그 둘레에 계자각 난간을 돌렸다. 문루에 오르내리는 계단은 문 양쪽에 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鹫头)와 용두 등 장식이 있으며, 추녀(사래) 끝에는 토수(吐首)가 끼워졌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대동문 문루에 평양종이 걸려 있어 시각을 알리는 기능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능은 평양성의 내성 남문으로의 대동문이 고려 개경의 내성 문루인 남대문과 같이 종루의 기능을 겸하였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점으로 내성이 가지는 기능이 도시생활의 중심 혹은 경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IP属地:浙江9楼2011-04-1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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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财名 崇仁殿(숭인전)国宝5号
                    时代 高丽时代(祠堂遗迹)
                    所在地 平壤特别市 中区 钟路洞
                    평양시의 중심부인 장대재 기슭에 서있는 숭인전은 본래 재계청, 문, 비각, 행랑 등 10여 채로 이루어진 사당의 본전이다.
                    숭인전은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으로, 기록에 의하면 고려 1105년(숙종 10)에 세우는 일이 건의 되었고 1325년(충숙왕 12)에 기자사와 숭인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조선 1428년(세종 10)에 중수를 시작하여, 1430년(세종 12)에 준공하였다. 후에 기자전으로 불리다가 1612년(광해군 4)에 숭인전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다수의 중수를 거치면서, 원래는 본전 외에 좌우 행랑, 정문, 비각 등 부속건물을 포함하여 10여 동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본전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파손된 것을 1954년에 정전과 대문을 복원하였으며, 1977년 평양시 도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전이 숭령전 옆으로 이건 되었다.
                    숭인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는 2고주 7량가 이다. 기단은 전면에 월대(月台)를 둔 이중기단으로 장대석으로 정연하게 쌓았다. 원형 주좌가 있는 초석 위에 배흘림이 완연한 원기둥을 세웠는데 네 모서리의 기둥을 제외한 기둥들을 8cm 가량 안쪽으로 놓아 안쏠림을 두었다. 또 중앙에서 모서리 기둥으로 갈수록 기둥의 높이를 약간씩 높여 귀솟음을 강조하였다. 천장은 원래 평반자였으나, 어칸은 연등천장으로 좌우협칸은 중도리부분에 맞추어 우물반자로 구성하였다. 창호는 원래 전면 어칸에 출입문을 두고 좌우 협칸은 세로살창을 두고 모서리 쪽에는 판문을 두었으나 이건 과정 중에 전면 어칸은 네 짝, 좌우 협칸은 세 짝 띠살문으로, 측벽에도 


                    IP属地:浙江10楼2011-04-1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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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칸에 벼락닫이창을 달았다. 문짝의 무늬는 사당 건물에 어울리게 능살무늬를 놓고 그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그렸다. 단청은 녹색 기운이 짙게 도는 모로단청을 사용하였다.
                      숭인전은 유교건축물이나 1325년의 연대를 가진 고려 말기의 것으로 당시의 건축양식의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전면어칸에는 ‘숭인전(崇仁殿)’ 현판이 걸려있는데, 현판 좌측에는 ‘万历四十一年三月日宣赐’ 으로 적혀있어 만력41년인 1613년(광해군 5) 3월에 사액(赐额)되었음을 알 수 있다.

                      


                      IP属地:浙江11楼2011-04-1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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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财名 崇灵殿(숭령전)国宝6号
                        时代 朝鲜时代(祠堂遗迹)
                        所在地 平壤特别市 中区 钟路洞
                        숭령전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해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영숭전(永崇殿)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 이미 ‘동명왕사’의 기록이 나타나며 고려시대에는 성제사(圣帝祠), 조선조에는 단군사, 단군전으로 불려오기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단군의 사당에서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된 것은 15세기 초부터이다. 이는《세종실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1429년(세종 11)에 기자사(숭인전) 옆에 정전과 동서행랑을 세워 ‘단군사 동명왕사’라 칭했으며,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시 전소되었던 것을 1617년(광해군 9)에 중건하였고, 숭령전이라는 명칭은 1724년(영조 원년)에 사액 받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732년(영조 8)에 중수하였고, 1804년(순조 4)에 평양부내의 대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지금의 숭령전은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는 2고주 7량가이다. 기둥은 약간의 흘림을 둔 원형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안쏠림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좌우 협칸에 중도리부분에 맞추어 평반자를 짜고 용문(龍纹)을 그렸으며, 중앙 2칸은 연등천장으로 하였다. 창호는 원래 중앙 2칸에 두 짝 판문을, 좌우 협칸에는 어칸 쪽으로 세로살창을 두고 외짝 판문을 우주 쪽에 달아내었으나 현재는 전면 각 칸 모두 네 짝 띠살문을 달고, 좌우 측벽에 두개의 벼락닫이창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IP属地:浙江12楼2011-04-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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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식성이 가미된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4면 모두 겹처마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벽체로 구획된 2개의 감실을 두고, 서측 칸에는 단군, 동측 칸에는 동명왕의 초상과 위판을 모셨다. 단청은 화려한 금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외문은 전면 3칸, 측면 1칸 5량가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는 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판문 상부에 홍살을 두었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정면의 칸수가 홀수인데 이 건물은 짝수인 점이 독특하다. 이는 서쪽 2칸을 단군제단으로, 동쪽 2칸을 동명왕 제단으로 했기 때문이다. 숭령전은 조선시대 중기의 사당 건축술이 반영된 귀중한 건축 유산이다.

                          


                          IP属地:浙江13楼2011-04-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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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财名 妙香山 普贤寺 九层塔(묘향산보현사구층탑)国宝7号
                            时代 高丽时代(塔类)
                            所在地 平安北道 香山郡 香岩里 普贤寺
                            묘향산 보현사에 있는 보현사 9층 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9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인데 현재는 상륜부가 노반석으로부터 결실되어 있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결구한 지대석 위에 높직한 괴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놓았다. 이 괴임단은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였으며 측면과 상면은 치석되어 있고 낮은 각형(角形) 1단의 괴임을 각출하여 하층 기단면석을 받고 있다.
                            하층 기단 면석에는 3구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고, 그 위에 갑석이 있는데 갑석 측면의 상부에는 연꽃문양이 있다. 상면에 낮은 각형 1단괴임을 각출하여 상층 기단 면석을 받고 있는데, 면석의 남쪽 면에는 안상 1구가 장식되어 다시 그 위에 갑석을 덮고 있다.
                            상층 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이 없으나, 연꽃문양을 가득히 장식하였으며 상면 괴임단 부분에는 높은 연꽃문양대가 있다. 기단 갑석에 있어서 하면과 상면에 연꽃문양을 장식하는 예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나타나는 특징이다.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1층 탑신석 남면에는 감실 하나가 있다. 1층은 높게 조성하였으나 2층 탑신부터는 낮게 조성하였다. 즉 2층 탑신석은 1층에 비해 5분의 1정도의 높이이며 2층부터 그 이상의 각 층은 별도 체감이 없이 거의 같은 높이로 올라가 세장한 탑신부로 보인다. 각 층이 같은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는 층단형의 옥개받침이 각출되었고, 상면에는 1단의 각형 괴임을 마련하여 그 윗 층의 탑신석을 받고 


                            IP属地:浙江14楼2011-04-1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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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탑에 대한 기록으로는 석탑기(石塔记, 고려 정종 10년, 1044)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州妙香山普贤寺」无□□盛□□韩境□□」奉告至尊□□」□愿以九层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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